교수들은 은퇴할 때까지 과제비 관리에 허덕이며 산다.  지난 수십년간 꾸준히 좋아진 우리나라 연구 환경에 대해 또 불평이냐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제도는 꾸준히 진화해나가야한다.  조금이라도 보완해서 얻는 득이 크다면 안 그렇게 할 이유가 없으니까.  이번 봄여름에는 종료 과제 최종 보고서를 두 개 제출했고, 제안서를 두세개 썼다.  제안서를 쓸 때는 관련 자료도 찾아보고, 내가 지금까지 해온 연구도 다시 요약해보고 (신입생들에겐 공부가 된다), 무엇을 어떻게 연구할까 고민도 해보니 제안서 쓰는 시간이 크게 낭비는 아니다.  하지만 과제 결과 보고서는 다르다.  과제 결과 보고서가 우리 국내 학계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걸림돌이라고 생각한다.  왜?  미국에서는 결과 보고서를 안 쓰니까.  난 미국 대학에서 교편을 잡아보지는 못했지만, 미국 대학 교수 친구들을 보면 제안서는 열심히 쓰느라고 바쁜데 결과 보고서를 쓴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미국 과학재단(NSF)의 경우, 대부분의 과제가 3년. 제안서는 쓰지만, 결과 보고서는 acknowledgement에 과제 번호가 들어가 있는 논문 제출로 대체한다.


우리나라 연구재단도 기초 연구 과제들의 경우 대개 과제 기간을 3년 이상으로 만들었다.  인건비도 풀링되고, 연구비 일정액은 과제 종료 후 1년간 소진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결과보고서는 써야한다.  단독 개인 과제의 경우는 그래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여러 명 이상의 교수들이 공동으로 하는 대형 과제의 경우 보고서 작성을 위해 각 세부 과제별 내용 취합은 정말 큰 부담이 된다.  지도교수가 대형 과제 PI(Principal Investigator)로 나설 경우, 박사 학생들의 반발이 (가능한 연구실에서만) 클 수 밖에 없다.


나도 공동 과제 책임 PI를 해봤고, 내 학생들도 연말에 과제 결과 보고서를 내기 위해 과제 결과 취합하느라 고생 많았다.  적어도 2주일, 많게는 3-4주씩 고생했다. 근데 그 결과 보고서를 누가 얼마나 볼까?  과제 결과 평가는 대개 40분~1시간 정도 한다.  20~30분 발표에 나머지는 질의응답.  액수가 1억이면 10분, 10억이면 100분이 되진 않는다.  몇 주를 들여 쓴 수십-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결과 보고서를 평가위원들이 미리 꼼꼼하게 읽어보고 들어올까?  절대 아니다.  당일날 평가장에 수북하게 쌓인 보고서를 발표할 때 뒤적이며 볼 뿐이다.  그러면 2장짜리 요약문을 써오라고 하던가.  평가위원별로 섹션을 맡아 리뷰하게 하던가.  도대체 누구 보라고 수십-수백 페이지짜리 결과 보고서를 쓰는지 모르겠다.  국정감사에서 국회의원들이 연구 결과 보고서 없다고, 예산 낭비했다고 그럴까봐?  설마???!!!!!


과제비 받아서 엉뚱한 데 쓰면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연구비 유용이 아직도 끊이지 않고 신문에서 다뤄지고 있는 현실에서 연구자들에 대한 신뢰 그리 높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성실하게 주어진 목적대로 연구비를 쓰려고 노력하고, 용도대로 집행하며 살고 있다.  그러니 이젠 일의 경중을 살펴야 하지 않을까.  우수 세납자 표창이 있듯이 우수 연구비 집행자들도 좀 믿어 주면 안 될까?  그래서 연구 과제 제안서대로 연구했고, 연구 결과물들을 학회에서 발표했으면 아무도 읽지 않을 결과 보고서 쓸 시간을 이젠 다음 연구 제안서 쓰는 시간으로 돌려주면 안 될까?  수억이나 세금을 썼으면 무엇을 어떻게 했나 정리해놓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누가 언제 읽을까를 고민해야한다.  언젠가 볼 누구를 위해 몇 주씩 결과 보고서를 쓰면서 낭비되는 국력을 이젠 고민할 때다.  연구 내용은 발표된 논문 제목만 늘어놔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누구나 봐도 손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결과 보고서는 애시당초 말이 안된다.  세금을 수억을 들여 박사급의 전문인력이 만들어내는 연구 결과물의 소비자는 해당 분야 종사자들이다.  수백 페이지짜리 결과 보고서를 일반 대중을 위해서 쓸 수는 없다.  두세장짜리 요약이면 몰라도.  논문에 기승전결 잘 정리해놓은 내용을 또 다시 짜집기해서 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과제 결과 보고서만 없애도 우리나라 연구 인력 전체가 일년에 적어도 2주의 시간을 연구에 쓸 수 있다.  52주 중에서 휴가 2주 빼면 남는 50주, 그 중에서 2주면 무려 4%.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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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물먹는 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