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영어 강의에 부쳐
    Miscellanies 2011. 4. 10. 16:56

    지지난 주에 보스톤에서 열린 학회에 다녀왔다.  내 지도학생이 하필이면 학술대회 첫 논문 발표자가 되는 바람에 나까지 무척 긴장했더랬다.  초청 강연 없이 8시 45분에 학술대회 준비 과정에 대한 간단한 대회장의 소개 후 9시부터 바로 논문 발표에 들어가는데 내 학생이 일번 타자가 되었으니 긴장될 밖에.  그 학생은 학부 때 여름방학 영어 연수와 대학원 과정 중에 미국에 8개월 다녀온 적이 있어서 영어가 조금 되기는 하지만, 전통 한국식 영어 발음을 구사하는 토종이다.  발표는 영어도 중요하지만 연구 내용을 짜임새, 조리있게 구성해서 전달해줘야하는데 발표 내용도 많이 다듬었고 연습만 열번 가까이 해봤더래서였는지 크게 떨지 않고 잘 마쳤다.  질문도 많이 들어왔더랬는데, 원체 토론에는 강한 학생이라 영어로 답해야했음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고 또박또박 포인트를 잘 짚어내어 마무리를 했다.  세션이 끝나고 휴식시간에 친구들이 와서 좋은 연구 발표였다고 칭찬해줄 때 어깨에 힘들어가는 이 맛, 이 맛에 교수한다.

    매년 연말이면 학생들 추천서 써주느라 무척 바쁘다.  대학원 진학, 취업, 장학금 등등 모두 외국으로 활동무대가 넓어지다 보니까, 온통 영어로 써줘야한다.  카이스트 첫 부임했을 때는 학생 추천서 한 장 쓰는데 하루가 넘게 걸렸다.  요즘은 두세시간내에 초고 만들어놓고, 며칠에 걸쳐서 조금씩 수정하는 정도로 나아지긴 했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교수들에 비하면 두세 배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 생각한다.  얼마 전에는 내 프로필을 영어로 써서 내야 했었는데 아무리 다듬어도 예로 보내준 다른 프로필에 비해 영 느낌이 살지가 않아서 끙끙거리고 있었더니 마침 방문 중인 미국인 친구가 쓱 고쳐줬다.  똑같은 프로필인데 친구가 고쳐주고 나니 내가 봐도 참 근사하더라는 거다.  어떻게 이렇게 잘 쓸 수가 있냐고 했더니 자기가 예일대학 학부 시절에 아주 빡센 영문학 강의를 들었는데 한 학기 내리 매주 금요일 아침까지 10장 정도를 작문해서 내야했단다.  그래서 그 학기에는 목요일 저녁엔 늘 밤을 샜고, 덕분에 작문에는 도가 텄다나! 그럼 그렇지, 학문에 왕도가 어디 있으랴, 열심히 노력한 거지.

    카이스트 부임해서 강의한 지난 8년 동안 나는 전 과목을 영어로 했다.  10년 넘게 미국 살면서 영어만 쓰다가 귀국하니 처음에는 우리 말로 강의하는게 힘들기도 했고, 영어 강의 인센티브도 쏠쏠히 괜찮았다.  어릴 때 미국에 일이년씩 두 번 살아본 경험 덕에 소위 본토 발음을 구사하고, 목소리도 또렷한 편이라 학생들이 알아듣기 쉽겠지 기대하긴 했지만, 학부 과목에서는 영어 때문에 강의 내용을 따라오지 못하는 듯 보이는 학생들이 늘 좀 있었다.  그런 학생들에게 이렇게 잔소리를 하곤 했다.  학교 졸업해서 취직하면 바로 외국을 상대로 영업도 하고, 신제품 연구도 하고 해야하는데 내 강의도 잘 못 알아 들었으면 여름 방학 때 영어 학원 하루종일 다녀서 일정 수준까지는 좀 올려놓으라고.  예전에 불란서의 Ecole Normal Superieux의 교수가 자기 학생 중 하나가 아시아권에 관심이 많아서 일본에 방문 연구를 일년 하러 갔는데, 일본어를 6개월만에 깨치더라며, 역시 우수하다고 자랑을 한 적이 있었다.  불란서에 ENS가 엘리트 양성소라면, 우리나라는 카이스트다.  우리 학교 학생들도 방학동안 몰입해서 영어하면 금방 될테니까.  믿고 쪼아댄 셈이다.

    나는 대학원생을 선발할 때 TOEIC 900점을 요구한다.  이 점수는 되어야 영어로 논문쓸 때 내가 영어 선생 노릇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어를 가르쳐주지도 않고 잘 하라니, 무책임한 거 아니냐 따질 수도 있다.  하지만 대학원 진학을 해서 연구로 세계 경쟁에 뛰어들고 싶다면 준비를 하고 와야한다.  외국 유학가는 학생들만 하면 되지 않냐고 안일하게 생각한다면, 국내 대학원은 경쟁력이 없다고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지 않은가.  내가 생각하는 TOEIC 900점은 어휘력이 어느 정도 되서 논문을 읽을 때 영어 사전을 옆구리에 끼고 있지 않아도 된다는 거지, 영어로 회화를 하거나, 논문쓰고 발표하는데는 충분치 않다.  영어 회화야 외국에 연구 겸해서 연수 다녀오면 어느 정도 해결되고, 논문 쓰고 발표하는 건 대학원에서 같이 해나가면 되니까.  그리고 그렇게 해나가면 된다.  본토 발음에 작문이 쓱쓱 된다는게 아니라 연구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만큼까지는 된다.  TOEIC 900점만 맞춰오면 나머지는 같이 해결해나가자는 얘기다.  지지난 주 보스톤에서 발표한 학생이 토종식 영어 발음으로 씩씩하게 발표하는 모습을 보면서 된다는 확신을 난 얻었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영어로 해야할 산더미같은 일에 미리미리 준비시켜놓는 셈이니까.

    어휘력이 어느 정도 되면, 그 위에는 문장력, 표현력, 논리적 사고력 등등이 필요한데 이건 굳이 영어 문제가 아니다.  총체적인 문제다.  우리 학부 교과 과정에서는 이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독서가 정말 중요한데 교양 과목에서 학생들에게 폭넓은 독서와 그의 비평을 통한 정서 함양을 잘 챙기는지, 전공 과목에서도 배운 것의 단순한 적용이 아닌 활용을 잘 할 수 있는 창의력을 자극하는지, 등등.  전과목 영어 강의가 최근 화두로 떠올랐다.  지난 주 한국과학영재학교에 가서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영어 강의를 하고 왔는데 영어 강의 임에도 불구하고, 질문에 대답도 척척 잘하는 학생들도 많았지만, 영어 강의가 힘들어 보이는 학생들도 있었다.  우리 말을 전혀 못하는 외국 학생들이 있어서 우리 말 강의는 할 수가 없었다.  예전에 우리 학과 External Advisory Committee로 Carnegie Mellon University의 학과장을 모신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우리 학교가 세계 일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국적을 불문하고 세계적인 석학들이 카이스트로 올 환경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이기 때문에 가능한데, 우리나라는 소수의 외국인들은 유치할 수 있을지 몰라도, 분야를 불문하고 국적을 초춸할만한 여건이 가능하겠냐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이였더랬다.  우리 학교가 혼자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라는 지적으로 이해했다.  교수진 유입도 그러한데, 학생들은 어떤가?  예전의 ICU, 현재 광주 과기원 등에서는 전과목 영어 강의를 해 온지 꽤 오래 됐다.  전과목 영어 강의가 학생들에게 경쟁력을 심어주기 위한 면도 있지만, 우리 말을 못하는 외국 학생들 때문이기도 하다.  외국 학생들을 유치하는 이유가 학생들에게 국제 감각을 배울 수 있는 자연스런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고 판단되는데, 전과목 영어 강의를 통한 득과 실을 따져보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국제화는 우리 사회가 당면한 큰 화두이다.  국제화의 일면인 영어 교육에서는 교수로써 내가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게 있고, 학교 차원에서 풀어줘야할 문제도 있고, 학생들 스스로 찾아나가야 할 때도 있다.  오전에 다른 학교에서 사회학 하시는 연로 교수님께서 우리 학교 사태가 걱정되서 전화를 주셨다.  우리 사회가 다같이 고민해야 한다 하시면서 학생들간의 소통의 장이 더 필요한게 아니겠냐 하셨다.  학생들간의 소통, 교수와의 소통, 나아가서 학교와의 소통.  이건 민주화 투쟁으로 청춘을 보낸 40대들은 잘 못하는 전공이다.  왜냐?  그 땐 소통의 부재 시대였기 때문에 소통 대신 투쟁을 했으니까.  민주화 투쟁 앞에서는 다른 어떤 명제도 중요한게 아니였다. 영어 교육?  그 땐 말조차 꺼낼 수 없었다.  이젠, 그 꿈에 그리던 민주화가 되서 더이상 획일화된 화두는 없고, 고민도 많아졌고, 거기에 대한 답도 많아졌다.  이젠 절대절명의 단일 명제가 아닌 다양성에 대해 우리 사회가 목소리를 아우리는 방법을 체득해야한다.  우리 사회가 같이 겪어내야할 소통의 문제,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  어린 세대가 겪어나가는 고통을 지켜보며, 어려운 문제이구나 가슴이 저민다.  그래도 시작해야지, 그리고 옆에서 북돋워줘야지 다짐한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