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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상 교수님, 감사합니다.
    Miscellanies 2012. 7. 12. 13:42

    어제 석사 때 은사이신 김종상 교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올봄 교수님 모시고 1박2일 속리산행을 아키랩에서 준비했는데, 가겠다고 약속해놓고는 결국 핸드폰 꺼놓고 내리 자느라 교수님 못뵌게 이렇게 한이 될 줄이야.  작년 겨울 송년회에서 뵜을 때만해도 건강 괜찮아보이셨는데....

    내가 석사때 왜 아키랩으로 가게됐는지는 하도 옛날 일이라 기억이 안 난다.  1988년 대학원에 진학할 때는 인터넷도 없었고, 웹도 없었고, 외국 대학에 관해 알아보려면 종로3가 허리우드 극장 뒤 고합 빌딩에 가서 열람되어 있는 자료를 살펴보는 수 밖에 없었고, KAIST라는 곳이 생겨서 대학원 진학을 하는 학생들 중의 반은 거기로 갔는데 입학 시험 준비가 까다롭다는 정보에 귀찮아서 신경쓰지 않았던 것 같다.  1978년 생긴 서울대학교 컴퓨터 공학과에는 1980년대 계속 교수 충원을 했지만, 그래도 아직 연구실이 10개가 되지 않았다.  7개쯤이였나?  아키랩이 선배들도 좋고, 봉급도 주고, 교수님이 편하게 해주신다는 소문에 진학을 했던 것 같다.

    들어가서보니 컴공과 1기 이하 줄줄줄 기라성 같은 선배님들이 떡 버티고 계시면서 연구를 주도하고 계셨다.  김종상 교수님께서는 학부 전기과, 박사 전자과, 그리고 1960-80년대 공고 특채생을 위한 공업교육학과에서 가르치시다가 전산학과가 생기면서 옮기셨다.  강의실이 흔들릴 정도로 쩌렁쩌렁한 목소리 때문에 김 교수님 강의시간에는 아무도 졸 수가 없어서 대신 교수님의 일본식 영어 발음에 처음엔 이게 무슨 얘긴가 갸우뚱하다가 나중엔 우리끼리 키득키득 웃으며 수업시간을 보냈더랬다.  대학원에 왔다고 교수님과 연구에 관한 시간을 갑자기 많이 보내게 되진 않았다.  선배들 주도로 연구실 세미나를 하면서 관심 주제를 잡아나갔고, 과제비 명목으로 봉급도 받았는데 과제는 박사 선배님들께서 다 맡아서 하셨더랬는지 나는 과제는 한 기억이 없다.

    대학원에 가보니 학과 전산망과 VAX system들은 과 조교 선배님 한두분께서 다 맡아서 관리하고 계셨고, 연구실마다 한두대 있는 AT/XT급의 PC들은 다들 알아서 관리했다.  석사 1년차인 내 업무는 출근하면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 넣다뺐다 하면서 선배님들 출근하시기 전에 서버 켜놓고, 퇴근할 때 끄는 것이였다.  지금처럼 Switched Ethernet이 아니라, Kleinrock 책에 이더넷 이론 배울 때 나오는대로 coaxial cable 버스로 학과내 모든 연구실을 연결했고, 누군가 모르고 T connector를 뽑아버리면 전압측정기를 들고 binary search로 문제의 연구실을 찾아다녔다.  미국 유학을 와보니, 과조교 선배 한두명이 하던 일을 학과장만큼 봉급을 받는다는 소위 시스템 관리소장 밑의 10명쯤 되는 스태프들이 해주고 있었다.  네트워크가 끊기고, OS 업그레이드할 때마다 온갖 패키지도 같이 업데해야하는 골치거리가 더 이상 대학원생들 것이 아니였다.

    그 때는 학회 때문에 외국에 나간다는 건 거의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이였다.  박사 졸업하기 전에 정말 운이 좋으면 한 번쯤? 전산 분야는 그 때도 학술대회가 중요했는데 학술대회 논문을 구해볼 수가 없었다.  저널이 아니라 도서실에 들어오질 않았으니까.  한국에서 누군가 한 명 운좋게 학술대회를 다녀와 프로시딩을 출판사에 넘기면 불법복사해서 그걸 들고 출판사 직원들이 연구실 가가호호 보따리 장사를 하러 다녔다.  그럼 우리는 쓸 훓어보고 쓸만하다 싶은 프로시딩을 몇 권 고르곤 했다.  어떤 학회에 중요한 논문이 발표되고, 어떻게 리뷰되는지는 석사때는 정말 생각도 못했다.  유학가서 만난 지도교수님께서 왜 한국에서는 관련 분야 논문이 2-3년쯤 늦게 발표되냐고 물으셨을 때, 외국 학자들이 와서 세미나해주는 것도 하나도 없고, 학회에 아무도 못가고, 학술대회 위원에 아무도 없으니 남들이 요즘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지는, 학술대회가 끝나고, 누군가가 프로시딩을 들고와서 불법복사해서 유포해야 겨우 보고, 그 다음 단계 연구를 구상해서 논문쓰니까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답해드렸던게 기억난다.  서울대 선배들 중에서 학술대회에 논문을 냈다 떨어졌는데, 그 다음 해에 거의 같은 아이디어로 다른 누가 논문을 냈더라는 얘기를 들으며 울분을 토하기도 했더랬지.

    Stevens의 TCP/IP Illustrated도 없었고, Andrew Tanenbaum의 Computer Networks도 1988년에 초판이 나왔으니 학부때는 William Stallings의 사전같은 책 밖에 없었다.  FTP, Telnet에 관한 내용은 선배들이 삽화까지 집어넣어 공부한 족보를 복사해서 공부했을 정도다.  그래도 대학원에 들어와서 서울대-카이스트 연결된 Internet으로 UUNet 뉴스도 읽고 하면서 신기해했더랬지.

    석사 논문을 LAN-ISDN 연동을 위한 게이트웨어 설계로 해놓고, Petri Net을 통한 검증을 택해서 아무도 모르는 Petri Net을 혼자 공부한답시고 책사서 끼고 다녔고, 이제와 생각해보면 왜 LAN과 ISDN 간의 게이트웨이가 왜 필요했다고 생각했는지 정말 모르겠다.  너 같은 후배 때문에 연구실 GPA 떨어진다고, 회식가서 돈없는데 고기 너무 많이 먹는다고, 청소 열심히 안 한다고 선배들한테 구박도 제법 받았는데, 뭐가 좋다고 맨날 꼬박꼬박 지금은 사라진 38동 꼭대기를 기어올라다녔을까.  그 땐 그랬다.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게 더 많았고, 가지고 있는 장비보다 필요한 장비가 더 많았고, 해야할 일이 많다는 건 알겠는데 어디부터 시작해야할지 감감했더랬다.

    그래도 그 시절이 그립고 좋은 건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갈 길을 열어 주신 교수님덕이 아니였을까.  여자 선배가 취업을 할 때 여자라고 논문 설마 자기가 썼겠나는 말도 안되는 중상모략까지 듣는다며 속상해하시고, 다독거려주셨던 교수님.  앞으로 쭉쭉 커갈 학생들에게 그냥 믿고 맡겨주셨던 교수님.  정말 딱 한 번 교수님과 신림동 어디 2차를 나갔는데 댄서들이 테이블위로 올라오자 손을 내저으며 내려와 달라고 하시면서 그 시절에도 여학생이 연구실 생활하기 편하게 신경써주셨던 교수님.  언젠가 한 선배님께서 내가 박사 때 쓴 논문 재밌게 읽었다라고 해주셨을 때 아, 내가 드디어 아키랩 천덕꾸러기 후배가 아닌 쓸만한 후배가 됐구나 스스로 얼마나 뿌듯했는지.  글재주가 없어 교수님 영전에 바치는 글로는 너무 초라하지만, 그래도 감사한 마음을 담고 싶었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편히 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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