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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간의 뜻읽기
    Miscellanies 2011. 4. 12. 23:55

    아침에 부모님이 거신 전화에 놀라 깼다.  아버지께서 대뜸 "뉴스에 감사 결과 카이스트 교수 177명이나 징계당했단다" 하시는게 아닌가? 아무리 잠결이라고 해도 500명이 채 안되는 교수들 중에서 177명이나?  내가 도대체 사깃꾼 집단에서 일하고 있단 말인가?  벌떡 일어나 "저도 지난 번 감사 때 출장비 중복 지급 받았다고 지적되서 40만원쯤 토해냈어요.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를 하고 있는 학교에서 교수들 삼 분의 일이나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죠! 행간의 뜻을 좀 읽어주세요!" 하고 전화끊고는 학교로 달려왔다.

    지난 1-2월에 교과부 감사 때문에 학교 행정이 마비됐었다. 지난 3년간 사용한 모든 경비 내역 및 출장시 강의 보강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내용이 나한테는 주였다.  학기 중에 출장 신청을 할 때는 강의를 어떻게 보강할 것인지 계획서를 제출하게 되어 있는데 나도 몇 번 계획서를 안 제출했더랬다.  이유인 즉슨, 출장 신청서 및 복명서를 그냥 서류로 꾸면 내던 시절에는 내가 작성하고, 복명서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숙제처럼 해서 바로 제출하곤 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모든 학교 서류 처리를 위해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이란 전자시스템을 도입하고 나서는 출장 신청서와 복명서를 온라인으로 하게 바뀌었다.  문제는 이 ERP 시스템이 문제가 많아서 툭 하면 다운되고, 속도도 느리고, 심지어 오류도 제법 있고 해서 나는 사용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ERP를 이용해서 제출해야되는 모든 서류를 사무원에게 전격 넘겼다.  해서 출장 신청서 및 복명서를 사무원이 꾸며주다보니 강의 보강 계획이 종종 빠지게 되었다.  카이스트 부임 후의 모든 강의 일정이 온라인에 남아 있어서 쉽게 빠진 계획서를 챙겨 제출한 것으로 해결되었고, 다음부터는 이런 실수하지 않으리라 챙기게 되었다.

    출장비 중복 지급 내용은 이렇다.  요즘은 해외출장 가게되면 볼 일을 하나만 보는게 아니라 근처 학교, 연구소에 가서 세미나도 하고, 또 대규모 학회 앞뒤로 붙는 행사에 초청되기도 하고 해서 출장 계획이 많이 복잡하다.  지지난 주 일주 다녀온 출장도 미국 보스톤 학회 들렀다가, 인도 하이더라바드에 WWW 2014 유치 발표 참석하고는 카타르 도하에 워크샵을 다녀와야 했다.  보스톤 학회 출장은 연구비로, 인도 출장은 대회 유치비로, 카타르 도하 방문 비용은 주최측에서 다 대는 걸로 됐는데, 출장비 교통정리하는 것도 장난이 아니다.  원체 유능한 사무원 덕분에 나는 복잡한 서류작성, 예산 집행 고민 안하고 다녀왔다.  근데 작년 여름인가 재작년 여름에도 이렇게 몇 군데 들러오는 해외출장이 있었는데, 그 때는 마지막 경유지에서 초청 경비 중에서 숙박비만을 초청한 측에서 부담했었다.  사흘 밤을 묵었는데 떠나기 얼마 전에야 일정이 확정되서 사무원에게 초청측 숙박비 부담을 얘기해주는 걸 내가 잊었더랬나 보다.  출장비가 얼마 들어오는지 챙겨보지도 않냐 하겠지만, 출장가는 지역에 따라서 일비, 숙박비, 식비가 다 다르고, 환율도 다 다르게 적용되고 해서 챙겨보지 않는다.  어차피 호텔비는 늘 부족하기 때문에 항상 룸메이트를 구해서 반값에 묵으려고 하고, 미국 출장가도 자동차 렌트하기에는 일비가 턱도 없이 부족하니까 렌트카할 친구랑 일정 맞춰 다니고 등등 생존 전략으로 버틴다.  거의 매주 가는 서울 출장에, 해외 출장, 기타 정산되는 영수증 등등 때문에 내 통장에는 "한국과학기술원"에서 매달 적게는 서너건, 많으면 열 건이 넘는 입금항목이 있어서 뭐가 뭔지 모른다.  해서 해외출장비가 대강 액수가 맞는 거 같으면 그냥 넘어간다. 

    감사에서 수많은 출장 보고서 중에서 딱 그것만 짚어낸 것을 보면 출장 신청서나 복명서에 내가 초청측에서 경비 부담이라고 썼나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게 중복지급된 지 알았을까?  사무원이 너무 미안해하며 토해내야될 액수을 알려줬을 때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갔다.  출장비 중복도 되겠지만, 출장비를 지급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리라.  사무원이 꼼꼼하게 챙겨주지만, 출장간다는 말을 할 정신조차 없을 때도 있으니 출장비 신청 못하고 다녀오는 경우도 있을테니까.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챙길 시간이 없어서.

    징계를 받았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학과장님이 공문을 보내셨던가?  뭐 내가 잘 한거는 없지만, 그것 때문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오늘 아침에 아버지가 전화로 깨우시기 전까지.  "교수 77명이 강연료와 출장비 중복 수령"이라는 숫자에 내가 포함되나보다.  잘 했다는 건 아니지만, 난 사깃군도 아니고, 국민의 세금을 떼어먹는 파렴치범은 더더욱 아니다.  그저 작은 실수를 한 것일 뿐이다.  내가 매년 쓰는 연구비는 2억에서 3억 정도이다.  큰 돈이기 때문에 전문 사무원을 두고, 학생들이나 나나 뭐든 돈을 쓸 때는 어떤 계정에서 어떻게 정산해야하나 물어보고 시키는대로 집행할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실수할 수 있다.  다시는 안하겠다 보장도 못하겠다.  실수하지 않게 노력은 하겠지만, 다시 실수 안 할 자신은 없다.  그러니 대부분의 교수가 파렴치범이고, 큰 일이다라는 확대해석은 하지 말자.  왜들 그렇게 확대해석을 하는지 행간의 뜻이 있으리라.  나는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 딸을 좀 믿고 행간의 뜻을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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