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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제 성실 중단
    Professional 2015. 2. 23. 18:18

    구정 연휴 마치고 출근한 월요일, 처음 받은 전화가 과제 중단 통고였다.  휴가에서 누렸던 나른함이 한 방에 날아갔고, 아~ 인생 편할 날 없구나라는 절망감에 목이 타올랐다.

    문제의 과제는 "신뢰성 검증을 겸비한 대규모 소셜스트림 분석 플랫폼 연구" 과제로 3명의 교수가 매년 2억 예산으로 3년간 진행하는 과제였다.  2년차에 상대평가를 받게되면서 하위 10%에 들어가 탈락하게되었다.  과제 짤린게 무슨 자랑이라고 블로그에 올리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난 12년간 국내에서 과제를 하면서 겪었던 고충 중 제일 강도가 높아서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지 싶어 적어본다.

    예전에 정보통신부(정통부)를 거쳐 지경부에서 방통위로 관리 체계가 바뀌는 동안 3+2 과제를 했던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5명의 교수가 매년 4억씩 했는데, 3년차 평가에서 과제비 삭감을 받아서 3명의 교수가 2억으로 과제 규모를 줄여서 마무리했다.  그 때는 내가 과제 책임자로써 어리버리하기 이를데 없었더래서 원천기술연구니까 연구만 잘 하면 된다고 생각했고, 2010년 4월 WWW에 "What is Twitter, a Social Network or News Media?"라는 근사한 논문 실적도 있어서 큰 문제 없을 줄 알았는데, 결과는 예산 삭감이였었다.  매년 과제 관리 기관이 바뀌어서 과제 보고도 바빴고, 설득도 더 바빴고 고달펐다.  실적은 과제 평가에서는 잘 인정받지 못해서 예산 삭감이 되었지만, 결국 그 논문 덕분에 2012년에는 당시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주는 지식창조대상을 받았다.

    이번 과제는 준비때부터 예전의 경험을 기반으로 과제 제안서도 짜임새 있게 작성했고, 구성원 간의 연구 내용도 하나의 큰 과제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도록 했고, 원천기술과제이지만 3년차에는 기술이전도 계획에 추가했다.  2014년 12월 중순에 담당 CP와의 진도점검 후 받은 컨설팅 보고서에서는 계획된 목표를 달성하였는가? 연구 결과의 질적 수준은 우수한가? 공동연구 협력, 연구실적관리가 적절한가?에서는 매우 우수, 연구 결과에 대한 검증 활동은 우수한가?에서는 우수를 받아서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실적도 꾸역꾸역 채웠고, 마지막 해에는 이런 저런 내용으로 알차게 마무리해야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날벼락이였다.

    여기 저기 전화해서 사정을 알아보니 미래창조과학부가 생기면서 과제 평가를 맡았던 KEIT와 KCA가 통합돼 IITP로 정리되면서 새로운 과제 평가 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는데 KEIT의 상대 평가 제도가 남았다고 한다.  상대 평가라함은 과제 평가 결과에 상관없이 전체 과제에서 일정 액수/갯수를 탈락시키는 제도인데 올해는 10-20% 예산 삭감과 1개 과제 중단이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같이 평가 받은 과제 6개 총 40억에서말이다.  

    우리 과제는 "신뢰성 검증을 겸비한 대규모 소셜스트림 분석 플랫폼을 연구개발하는 과제로, 2차년도에 계획한 주요 연구내용 및 목표를 성실히 달성한 것으로 판단됨." "그러나 동 과제는 2015년 연차(상대)평가대상 과제로, 향후 기대되는 실적과 효과가 우수할 것으로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경합과제 대비 다소 미흡하였고, 상대비교평가에 따라 하위 20%에 해당되어 성실중단으로 판정함."  결론은 과제 성실하게 수행했지만, 타 과제에 비해 못 했으니 그만해라. 하지만 "관련 규정에 의거, 상대 평가 결과에 대한 이의 신청을 할 수 없음." 어쩔 수 없어서 이렇게 블로그에 넋두리를 한다.

    과제 평가 제도는 끊임없이 진화해야한다.  5년 전에 비해 과제 심사 자체는 많이 좋아졌다.  예전엔 과제 평가위원들로부터 무례한 어투의 질문을 받기도 하고, 과제 내용과 전혀 관계없는 쌩뚱맞은 질문을 받기도 했는데, 이번 과제 심사에서는 예의를 지켜달라는 주의 사항이 맨 처음에 낭독됐고 녹취가 된다고 해서인지 과제 심사위원분들로부터 점잖고 나름 성의있는 질문을 받아 큰 문제없이 과제 평가를 받았더랬다.  그래도 3년을 예상하고 과제를 시작했는데 예산 책정이 안 되서 상대 평가로 짤리는 제도는 왜 생겼는지, 어떻게 진화해야할지는 모르겠다.  내 연구만해도 정신없이 바쁜데 다른 과제가 뭘 어떻게 더 잘 했는지 챙겨볼 시간은 없다.  같은 분야 비슷한 내용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3년 과제하라고 해놓고, 예산이 없어 그만하라는 것도 OECD 국가에서 2억짜리 원천기술 과제에 할 얘기는 아니지 싶다.  이게 무슨 정치가들 선거용 공약도 아니고 말이다.

    내가 심사받은 6개 과제 중에서 제일 잘 했는데 억울하다는 하소연이 아니다.  난 성실하게 3년 규모로 과제 제안서에 씌여진대로 연구했음에도, 이렇게 매년 과제 평가 제도가 어떻게 적용되고, 예산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조바심을 내면서 연구해야 하는게 우리나라 현실이라는게 서글플 뿐이다.

    오늘도 "[미래창조과학부] 국가연구개발사업 표준 성과지표 통합 설명회 개최 안내"라는 긴 제목의 이멜이 왔지만, 과제를 짤렸으면서도 이런 설명회에 가기보다는 다음 과제 제안서를 쓰기 위해 학생들과 머리 맞대고 연구를 하는게 내 본분에 충실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과제 관리를 위해 수많은 공무원과 심사위원을 고용하고, 중단할 과제들을 선별할 기준을 만들고, 중단된 과제 책임자들의 불평 전화를 받는데 쓰이는 예산을 과제 평가 간소화에 쓰면 더 좋지 않을까?

    여튼 오늘은 힘빠지는 날이다.  속상해서 투덜거리며 희생양을 찾아 눈을 희번덕거리는 교수에게 "다음 과제 제안서에 힘을 쏟아요~" 하는 무한 긍정 마인드의 학생 멘트에 빠지는 힘을 추스려본다.

    p.s. 연구 내용의 개요는 온라인 미디어 상에서 사용자들의 프로필 정보를 추론하고, 정치 성향을 유추하고, 통계 보정을 통해 온라인 소셜 미디어에서 표출되는 의견의 신뢰도를 높이는 기술 개발이다.  트위터 사용자들의 의견을 여론으로 반영하려면 나이, 성별, 지역이 파악되어야 하기 때문에 사용하는 언어, GPS 태그 등을 사용해서 사용자 프로필을 추론하는 부분을 우리 팀이 맡았는데 트위터 사용자 프로필을 추론해보니 남자가 여자보다 3-5배 많고, 10대가 과반수이며 40대 이상은 거의 없고, 서울/경기 지역에 편향되어 있다는 잠정적 결론이다.  국정원이 이런 걸 미리 알았으면 그리 고생해서 조작을 안했을텐데라고 발표 때마다 멘트를 하고 다녔는데 설마 그 얘기가 미움을 사서?라고 486세대만이 할 수 있는 피해의식에 쩔은 생각에 잠시 웃고 넘어간다.

    p.p.s. 미래부가 가지고 있는 연구 예산이 한국연구재단으로 조금 더 가야하는 거 아닐까 싶다. 20년 전 국내 낙후된 산업은 국가 정책적 지원이 많이 필요했었겠지만, 20년 후 한국은 지금 연구재단 지원받은 과제들이 먹여살릴테니까. 우린 정말 그 때까지 기다리다가 굶어죽을까하는 조급한 두려움에 쌓여있는 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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