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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산 분야 학술대회의 역사
    Professional 2014. 2. 19. 15:44

    지난 주 WWW 2014의 MSM 워크샵에 낼 논문 최종본 작업을 하던 중이였다. 최종본인데 아직도 섹션 제목이 introduction, related work, methodology, evaluation, conclusions 이렇게 되어 있길래, "야, 이건 내용, 분야 상관없이 어느 논문에나 다 갖다붙일 수 있는 generic한 섹션 제목들이네. 좀더 descriptive하게 안 돼냐?"라고 feedback(내지는 잔소리, 짜증, 구박 등등의 부류의 한 형태)를 주고보니 나는 박사 과정때까지도 그렇게 한심하게 섹션 제목을 썼던 것 같다.  "그래도 니가 내가 석사할 때보다 훨 잘 한다" 해줬더니 학생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였다.

    내가 국내에서 석사 과정을 밟던 80년대 말에는 학술대회 논문을 구해보는게 하늘의 별따기였다.  영어 논문 작성법에 대한 자료는 구해볼 생각도 못했다.  대학 도서실에는 저널만 들어오고, 그것도 한참 지나서 들어왔고, 인터넷이라고는 80x24 CRT 터미널로 겨우 UUNET 뉴스 볼 수 있었고, IBM 360 메인프레임 들어가야 BITNET으로 외국 접속이 됐더랬는데 그것도 속도가 너무 느려 뭐 쓸만한 일을 했던 기억이 없다.  그 당시 논문 제출은 프린트물로 우편으로 보냈고, 리뷰어들한테도 우편으로, 그리고 리뷰 결과는 이멜로 했다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 논문이 모이면 학술대회를 했고, 80-90년대 학술대회 참석한다고 외국에 나가는 건 별따기였는데 몇몇 사람이 별을 용케 따서 갔다오면 그 학술대회 논문집을 복사집에 넘기고, 그런 불법복사 논문집을 대학원 연구실 방문 판매를 했더랬다.  그래서 예전에 미국 지도교수님께서 왜 한국에서는 연구 내용이 꼭 2-3년 늦은 주제로 나오느냐 물으시길래 이래저래해서 그렇다고 말씀드렸더랬다.

    시대가 바뀌어서 90년대 중반부터는 Mosaic, Netscape가 등장했고, 전산 분야 연구자들이 자신의 논문을 웹페이지에 올려놓기 시작하면서 인터넷으로 연결된 곳이면 어디든 논문을 쉽게 구해 볼 수 있게 되었다. 90년대말 2000년대초에 교과부에서 주도한 BK 사업덕에 대학원생들 해외 학술대회 참가가 용이해졌고 2003년 내가 귀국할 때에는 이미 출판사 직원들의 연구실 방문 판매가 사라진지 오래였다.

    60년대 분야의 태동기 때부터 학술대회 위주로 발전한 전산학 분야가 타 분야에 비해 국내 학계가 따라잡기 어려운 여러 이유 중에 위의 방법론도 큰 요인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직도 technical program committee의 face-to-face meeting은 거의 미국이나 꿈에 한번씩 유럽에서 열리는 현실이고.

    이런 상황에서도 전산학 분야 학술대회에 논문을 내고, 발표를 하는 국내 연구진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현실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CHI 2014 같이 대규모 학술대회에서 우리 학과 박태우군(지도교수 송준화)이 best paper honorable mention도 받고, USENIX ATC 2013에선 한양대 원유집 교수님팀, USENIX FAST 2013에선 홍익대 노삼혁 교수님팀이 최고 논문상을 수상하는 등 정말 기분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고 있다.  반면 아직도 어두운 구석이 있다.  우선 국내 과제 실적에서 이런 학술대회 논문이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엊그제 방통위에서 2013년도 실적 중 SCI 논문이 실적 미달이라 예산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보고 안 된 최근 실적 챙겨달라는 이멜을 받았다.  우리 과제에만 한정된게 아니라 특정 분야 전체 과제에 대한 내용이긴 했는데 어찌 되었건 전체 통계에서 예외가 쉽지 않은 현실이다.  한국연구재단 현실도 과히 다르지 않다.  한국정보과학회에서 SCI의 폐해에 대해서 보고서도 작성하고, 신문에 기고문도 내고 하는데 정부 기관의 제도를 바꾸는게 이렇게 어려울지는 정말 상상을 못했다.

    한국정보과학회에서도 자체적으로 좋은 학술대회를 만들어보려고도 하는데 이건 과제 심사 기준을 바꾸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한다.  좋은 학술대회를 새로 하나 만든다는건 steering committee들의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본 학술대회의 예를 들어보겠다.  ACM SIGCOMM의 Internet Measurement Conference는 INFOCOM이나 SIGCOMM에서 measurement 분야 논문이 쉽게 실리지 못해 튕겨져 나가는데 그러기에는 좋은 내용들이 너무 많고, 또 이 분야 논문들로만으로도 학회를 만들만한 충분한 모멘텀이 있다는 확신하에 몇명이 모여 시작했다.  자신의 박사 논문 하나로 Internet measurement 분야를 거의 새롭게 만들다시피한 Vern Paxson, Web, HTTP에 관한 책을 쓴 Jennifer Rexford와 Bala Krishnamurthy, 그리고 Sprint에 해당 주제로 막 연구팀을 만든 Christophe Diot가 모여 의기투합했고 2001년 이틀짜리 워크샵으로 시작해서 지금까지 오고 있다.

    ACM SIGCOMM의 또 다른 학회인 CoNEXT는 유럽 연구자들이 주동이 되서 만들었다. 컴퓨터 네트워크 분야 학술대회가 너무 많다고 판단되서 QoFIS, NGC, MIPS 등의 학술대회를 닫는 조건으로 거기서 활동하던 사람들을 다 모아서 하나의 학술대회로 정리했다.  ACM SIGCOMM에서 2013년에 시작한 COSN이란 학술대회 역시 social network 관련 연구가 전산학의 많은 메이저 학술대회에 co-loc workshop으로 흩어져 발표되는 것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SIGCOMM/USENIX의 WOSN, EuroSys의 SNS, SIGMOD의 DBSocial, KDD의 HotSocial, WWW의 PSOSM, 그리고 VLDB의 WOSS 워크샵을 다 접고, COSN을 만들었다.  2010년 ACM SIGOPS와 USENIX 지원으로 시작된 APSys는 EuroSys를 모델로 아시아권에 시스템 분야 연구자들의 모임의 장을 만들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2011년 학술대회장, 2012년 조직위원장으로 해보면서 정말 감탄한 것은 steering committee에 있는 시스템 분야의 기라성 같은 사람들 (Frans Kaashoek, Peter Druschel, Gernot Heiser, Zheng Zhang 같은 사람들이 학술대회에 와서는 학회 전날 리셉션부터 오프닝, 포스터 세션, 저녁까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질문도 하고, 포스터 발표하는 학생들에게 의견도 주면서 학회에 착실하게 참여를 하다는 점이다.

    1980년대 국내 대학들에서 전산학과를 앞다투어 만들던 시절 전산 분야 대규모 학술대회라곤 춘계 추계 정보과학회밖에 없었다.  조그만 워크샵들이 여기저기 열려서 나도 충무에 한 번 다녀왔던 적이 있었지만, 봄가을 정보과학회에 대학원의 모든 연구실들에서 우르르 몰려갔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젠 연구회별로 학술대회, 워크샵도 활발하게 진해되고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학술대회 논문에 대한 리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학술대회의 질은 제출되는 논문도 중요하지만 그 논문에 누가 얼마나 열심히 리뷰를 해주느냐가 관건이다.  좋은 리뷰가 좋은 학술대회를 만든다.  우스갯소리로 ACM SIGCOMM에서는 리뷰의 word count distribution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누구의 리뷰가 제일 길고 친절하고 큰 도움이 된다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체감 온도를 얘기하자면 SIGCOMM TPC를 하면 2-3월 주말에는 아무 것도 못한다.  NSDI는 가을 학기가 지옥이 된다.  20편 안팎의 14페이지짜리 논문을 읽고 장문의 리뷰쓰고, 남의 리뷰도 읽고 champion을 할 것인가 assassin을 할 것인가 논리를 정리해 나흘 정도 일정을 빼서 1박2일 TPC회의를 다녀오려면 말이다.  IMC, CoNEXT, COSN 등등의 학회는 분야가 좀더 집중되어 있고, short paper도 있어서 workload가 조금 줄지만 강도는 전혀 영향이 없다.  학술대회장이 되면 논문도 대강 다 훑어봐야 하고, 리뷰도 꼼꼼하게 읽어야하고, 리뷰어들이 리뷰 제때 안 하면 독촉 이멜 보내고, 저자들끼리 self-plagiariam 이다 아니다 싸울 때 중간에 중재도 해야 하고 (희한한 케이스가 꽤 있다는), plagiarized 논문이 생기면 저자들의 해당 학과/학교에 통보하고 처벌을 요구해야학고 등등 태산같은 잡일들이 생기지만 모두 좋은 연구를 위한 인프라에 투자한다 생각하고 기꺼이 감수한다.

    이런 리뷰를 받기 위해서 덜 준비된 논문을 내는 경우가 제법되니까, acceptance ratio 30% 이하의 몇몇 학술대회에서는 long review의 노력을 중상위권 논문에 집중시키기 위해서 quick reject란 제도를 만들기도 하는 등등 학술대회는 끊임없이 진화해가고 있다.  새로운 학회를 만들어야 하는 필요성은 과연 좋은 논문들이 발표의 장이 없거나 흩어져 있어서 새로운 장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 학술대회에 3-5년 꾸준히 나오면서 좋은 논문도 내고, 리뷰를 착실하게 해줄 동료들이 10명 이상 있는지 판단해보면 된다.  국내 학술대회는 상대적으로 이런 모멘텀을 만들기 어렵다.  숫적인 열세도 있고, 위에 기술한 바처럼 국내 과제 실적으로 인정되지도 않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국내 연구진들끼리의 모임 및 정보 교환의 장이 없어서는 절대로 안된다.  강약 조절을 잘 해서 연구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계속 진화해가야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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