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세월호, 우선 시작은 현실 직시 (I)
    Miscellanies 2014. 5. 7. 23:33

    세월호 참사는 나로 하여금 지금 하고 있는 밥벌이 말고도 무언가 더 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었다.  무엇을 어떻게 더 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내 머릿속부터 좀 정리해보려고 한다.

    내가 태어난 60년대의 대한민국은 제 3세계였다.  폭도들과 같은 거지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아침마다 대문앞에 깡통을 놓고는 문이 떨어져라 쾅쾅 두드리고 가면 얼른 밥을 담아내놔야했고, 거리엔 버스와 세발용달트럭들이 대부분이였다.  도로에 차선이란 개념은 필요도 없었고,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겨우 있는 정도?

    국민학교 시절의 70년대는 유신 정권의 위대함이 모든 뉴스매체에 꽉꽉 차 있었더랬다.  극장에 가면 애국가듣고 앉아서 대한뉴스 십분 더 보고 영화를 볼 수 있었고, 우리나라 국무총리는 김종필만 할 수 있는 자리인 줄 알았다.  수출 목표 매년 얼마 초과 달성이 지속되서 초과 달성을 못하는게 이상하게 느껴졌고, 70년대 끄트머리에는 자가용을 가진 사람들이 주위에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미제"는 우리가 갖지 못한 어떤 "이상형"으로 단단하고, 오래 가고, 믿을 수 있는 신용의 상징이였다.

    70년대 마지막은 박정희 대통령 저격 시해로 마무리하면서 또 다른 군사 정권의 80년대가 시작됐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몇 단계만에 우리는 이미 한강의 기적을 시작하고 있었고, 제3세계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아시아의 사룡으로 대만, 홍통 등과 어깨를 겨누기 시작했다. 아시안 게임을 유치하고, 지하철 2,3,4호선 공사가 진행되면서 서울시는 전체가 공사판이였다.  대학가는 최루탄 가루 속 혼돈이였지만 박종철, 이한열 열사의 희생 덕에 군사 정권을 종식시키는 모멘텀을 만들 수 있었고, 민간 정부로의 무혈 정권 이양이 실현됐다.

    남들 보기에도 숨가빴던 70, 80년대의 발전을 우리는 90년대에도 밀어부쳤고, 97년의 IMF 사태도 버텨냈다.  개발도상국이라고 하기에는 윤택한 삶을 누리기 시작했고, 서편제와 모래 시계로 시작된 한류 영화와 드라마 붐은 90년대를 유학생으로 미국 시골에서 보낸 나에게도 체감되기 시작했다. 서편제 이전엔 편집과 더빙의 어색함에 마음 졸이며 봤던 우리 영화를 어느 샌가부터 긴장풀고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엽기적인 그녀"가 나왔을 때는 미국서 태어나고 자란 조카들 눈에도 어지간한 미국 영화보다 재밌고 나아보이게 됐다.

    2000년대 귀국해 서울이 아닌 대전에 자리잡았을 때는 서울은 이미 내가 자란 도시의 몇 배처럼 느껴졌고, 말죽거리 부모님 댁에서 불광 동생집의 거리는 비록 지하철로 연결되어 있지만 길이 막히면 서울-대전간보다 그다지 가깝지 않았다. 10년만에 돌아온 서울은 내가 모르는 내부순환로, 지하철 7,8,9호선이 놓여있는 낯선 도시였고, 외국 친구들이 와보고 싶어하는 도시로 부상하고 있었다.  귀국한지 십년, 공항에서 우리 집까지 찾아오는 법을 적어주면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루면서 정비해놓은 대중 교통 수단 덕에 외국 친구들이 들락거리기 쉽게 됐고, 나보다 순대국, 오골계 삼계탕을 더 잘 먹게 되었다.

    21세기 들어선지 벌써 십년도 더. 이만불 턱걸이에서 삼만불로의 도약을 위해 정부는 수만가지 작전을 수립하고 있고, 산업계는 차세대 먹거리를 만드느라 분주하다.  이혼률, 자살률은 세계 최고인데, 출산률은 바닥이라 10년 후 고등학교 졸업생이 현재의 2/3로 줄어들기 때문에 대학 입학 정원 조정에 교육계가 삐걱이고, 공단은 외국인 노동자 유치에 한참이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발전을 이룩한 우리는 열심히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지만 여기저기 빈 틈이 너무 많다.

    90년대 유학 중 어느 날 아침 하우스메이트들이 백화점이 하나 무너졌다는 뉴스가 라디오에 나왔다고 했을 때 설마 너네가 잘못 들었겠지 했었는데, 그게 삼풍백화점임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어떻게 강남 한복판 그 비싼 땅값에 지은 백화점이....  그 때 독일 친구랑 나눴던 대화가 생각난다.  너네 독일에서는 아파트 같은 시멘트 건물들은 몇 년에 한 번씩 수리를 하냐? 벽에 금이 가면 덧칠하고 페인트칠 해야하지 않냐 했더니, 시멘트 건물이 왜 금이 가냐고 물었다.  아....  난 금이 안 간 시멘트 건물을 그 때까지 본 기억이 없어서 원래 금이 가면 안 되는 건 줄 몰랐다.  그 때 깨달았다.  우리 아직 멀었구나.  작년에 이사들어온 노출 콘크리트 개념의 새 건물 바닥도 여기저기 금이 가있다.  다행히 외벽에는 금간게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우리 학교 건물 짓는데 아직도 금이 가고, 학기 등의 일정 때문에 완공 전에 입주를 시작해야한다면 우리 사회의 다른 곳도 마찬가지겠지 유추한다.  우리 사회에 이런 부분이 얼마나 있는 것인지, 내가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있는지, 내 분야에서는 나름 열심히 제도 개선에 대해 부지런했다고 생각하는데, 과연 내 분야에서만 열심히 하면 되는지 세월호 참사는 나에게 자괴감을, 그리고 무력감을 안겨주었다.  그렇다고 지금 하는 일도 잘 하지 못하면서 내 일은 몰라라 뛰쳐나가면 안되지만 지금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무엇을 더 할 수 있는지는 곰곰히 고민해보기 시작하련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